반가운 책을 만났다. 박사과정 시절 브루노 라투르를 열심히 읽다가 접한 아네마리 몰의 <바디 멀티플>이라는 책이다.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처음 만난 당시에는 매우 따끈따끈한 책이었던 셈이다. 번역자는 20년만에 때를 만나 번역되었다고 말하는데, 20년 동안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 당시 책을 읽을 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신기한 책을 도서관에 신청한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해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저자는 병원에서 동맥경화증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인류학적으로 관찰한다. 환자, 의사, 간호사, 의료장비, 진료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또는 교차하면서 동맥경화증(이라는 진단과 처방과 치료와 후속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마 이 책을 여는 사람들은 내용만큼이나 형식에서 놀랄 것이다. 나도 깜짝 놀랐었다. 책 본문은 상/하 두 칸으로 분리되어 있다. 윗쪽 칸은 병원에서 관찰한 내용들을 현장감있게 적고 있다. 아랫쪽 칸은 이 연구를 위해 참고한 문헌들을 비롯해 각종 텍스트를 정리하고 있다. 얼핏 보면 각주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위쪽 칸과 아랫쪽 칸의 내용이 일대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윗 칸의 내용을 주목하든 아래 칸의 내용을 주목하든 두 내용은 이해하는데 서로 도움이 된다. 원서는 위아래칸이 비슷하게 나뉘어 있었던 듯한데, 번역서는 윗 칸이 마치 본문인 듯 큰 면적을 차지한다. 독자의 충격을 줄이려는 노력일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이 언제쯤 나오는지, 나오긴 하는지 궁금해하며 읽어갈 예정이다. 끝까지 읽을테니 마지막 문단을 위/아래로 나누어 미리 적어놓아야 겠다. 먼저 윗 칸의 마지막 문단. 저자는 ‘누구의 정치학’이 아닌 ‘무엇의 정치학’을 강조한다. 누가 결정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대변되고, 누가 개입하는지에 관한 '누구의 정치학'이 아니라, (사람만이 아니라) 무엇이 실행되고 무엇이 결합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무엇의 정치학'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하나 아니면 여럿이 아니라 하나나 여럿으로 규정할 수 없는, 때문에 배제하거나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하나 이상이면서 여럿은 아닌 무엇(다중신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계속해서 따라가보라는 주문이다. 그 개입, 결합, 실행이 좋은가(선인가)?
"그래서 이 책은 비판적이지 않더라도 중립적 연구는 아니다.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다른 편파성의 양식들이 있다. 과학들 간의 전통적 위계질서를 약화시킴으로써 위계질서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분과학문들을 강화할 수 있다. 의심의 지속적인 가능성을 지적함으로써 자기들이 결국 과학을 혼란스러운 실천에서 구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들의 자신감(그리고 확신시키는 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특정한 차원 안에서 다른 개입들을 비교하기보다는 비교 가능성의 다양한 차원을 열어 놓음으로써, 최근 가장 관심을 덜 받는 차원들에 틈을 내주고 이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준다. 누구의 정치학과 주로 가기보다는, 무엇의 정치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전문 영역을 열어 놓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선택이 무엇의 정치학(존재론을 상정하기보다 포괄하는 정치학)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용어인가에 대한 의심은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리주의적 환상에 맞선다. 다중신체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실재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수많은 지적 반사작용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이 연구는 의심을 몰아내려 하기보다는 일으키려 한다. 최종 결론 없이 여전히 불완전할 수도 있다. 열린 결말은 부동자세를 뜻하지 않는다."
아래 칸의 마지막 문단. ‘위치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데,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수잔 벅 모스가 지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정작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읽어보지 못했다. 저자는 마지막 문단을 푸코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낸다. 본문에 제목이 나오지 않아 참고문헌을 찾아보니 P. Rabinow가 편집한 <The Foucault Reader>에 들어 있는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라는 글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보편성의 꿈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방법들을 열어 놓았다. 발터 벤야민은 급진적인 예를 훌륭하게 제공한다.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1999)는 철학과 특정한 지상의 한 장소에 동시에 위치해 있다. 그 장소는 바로 파리다. 현대적 도시. 파리의 건축. 아케이드. 이방인들 간의 마주침. 그 책은 생각하기의 위치성(그것의 대상, 가능성, 실행, 수행적 노력)에 주목하며,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존경하는 선조들을 형성한 철학적 문헌을 표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하기의 위치성에 대한 명시적인 주목이다. 마지막으로 미셸 푸코로 마무리하겠다. 그의 저작에서 위치성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은 철학을 첫째로 가치 있는 무엇, 영원히 이동하고 변화하는 무엇으로 만든다. 지금-여기와, 우리 자신과 연결되었음을 천명하는 철학에 참여하는 방식은 보편적일 수가 없으며, 보편적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역화된다. 푸코는 주로 경험적 문제들을 역사적인 방식으로 탐구한다. 그러나 민족지학적, 혹은 다소 실천지적 방식으로 쉽게 확장 가능하다. 그러므로 다음 인용에 나오는 “역사적” 위치성에 ”지형학적“인 것을 덧붙여야 한다. 그러면 문헌에 관련된 이 하위텍스트는 문헌에서 가져온 말들로만 적합하게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을 이론, 신조로는 물론이고 축적 중인 영속적인 지식으로도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 존재론은 태도, 에토스, 철학적 삶으로 생각해야 한다. 철학적 삶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비판은 우리에게 부과된 한계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 너머로 나아갈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다”(Foucault 1984,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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