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사 관련 책을 읽고 싶었는데, 책장에 이 책이 꽂혀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 근무했고 현재 부산대학교에 재직 중인 송성수 교수가 ‘한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의 하나로 낸 책이다. 출판사는 들녘.
이 책을 왜 샀을까? 아마 포틀랜드에 가기 전 페북에서 경남대 양승훈 교수의 추천글을 읽고 충동적으로 구매한 듯 하다. 산업, 지역, 일자리에 대해 고민이 많아서 이것저것 읽고 있던 때였겠다. <한국의 산업화와 기술발전>의 부제는 ‘한국 경제의 진화와 주요 산업의 기술혁신’이다. 1950년대부터 한국 경제의 변동과 산업의 성장, 이에 맞추어 기술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주석과 참고문헌을 빼고도 470여쪽에 달한다.
한국의 산업화와 기술발전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본 책이 없어서 저자의 관점이나 정리가 특이한지 어떤지 판단할 수는 없다. 앞 부분은 시간에 따라 과장없이 담담하게 정리하고 있다. 아, 그렇구나 정도의 느낌으로 읽어 나간다. 담담한 서술 뒷편으로는 땀과 피와 모략과 배신과 열정 같은 이야기들이 있겠지 싶다. 70년대를 넘어 80년대로 넘어가면 저자가 도저히 못 참고 폭죽 터트리듯 내놓는 에피소드가 있을까. 한 두개 정도의 놀라운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차분히 읽어보기로 했다.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 거리가 없더라도, 다음에 다른 책을 읽을 때 묘하게 시차를 느끼게 하는 기준이 될 수는 있을테다. 471쪽의 마지막 문단을 옮겨보자.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써야하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초고를 완성했던 2019년 봄에는 아직 중국에 추월당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끝으로 한국의 기술발전이 과거와 같은 경로를 계속 밟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도 유념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은 선진국의 기술을 추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추월하기도 했지만, 향후에는 다른 후발국의 추격이나 추월에 의해 한국이 ‘추락’할 염려도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장기적인 역사를 돌이켜보면, 후발자가 선발자를 따라잡으면서 선발자에서 후발자로 주도권이 이동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중국의 추격이 거세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은 중국의 고도성장 덕분에 수출을 늘려갈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한국 제품과 중국 제품이 국내외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끊임없는 기술혁신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기는커녕 중국에 추월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1950년대의 수입대체 공업화를 다룬 2장(경제 재건의 시도)에 이어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수출지향 공업화를 다룬 3장(급속한 경제개발과 기술습득)과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다룬 4장(제2차 고도성장과 기술추격)을 읽었다.
2장에서는 1950년대에도 소비재공업의 수입대체나 생산재공업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국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했다. 이어 3장에서는 박정희 정권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획 ‘수립’에 그치지 않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리 박정희 정권기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원안대로 계속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수정을 거쳤다는 점도 중요하다. ‘수출지향 공업화’의 경우도 박정희 정권이 처음에는 수입대체에 초점을 두었다가 1964년 하반기부터 경공업제품의 수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면서 ‘전 산업의 수출화’로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해당 산업 육성을 위해 개입했지만 석유화학산업과 철강산업의 경우 전폭적으로 개입한 반면 전자산업은 개입 정도가 약했고, 자동차산업과 조선산업은 중간 정도였다. 즉, 산업에 따라 정부개입의 정도가 달랐다. 1966년 최초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인 KIST를 설립하여 (선진국과 달리) 기초연구가 아닌 응용연구나 개발연구를 수행하면서 국가정책의 기획과 기술지원을 담당하도록 한 것도 특이하다. 이 시기에 한국 기업은 선진국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던 ‘성숙기’ 기술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미 상용화된 기술이기에 선진국(특히 일본)의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기술 습득을 위해 선진국의 기업에 해외연수를 간 직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식적/비공식적 관계를 적극 활용하면서 어마무시하게 노력했던 사례들이 계속 등장한다. 낮에 교육을 받고 저녁에 여기저기 술자리에서 추가로 정보를 획득하고 밤에 다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한 후 매일 보고서를 작성해 한국에 보내는 일이 해외연수 간 직원들의 일상이였다고 한다.
4장에서도 해외연수 직원들의 에피소드는 비슷하다. 이제 공식적인 교육에서도 비공식적 관계에서도 핵심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워지면서 관찰과 눈치로 정보를 알아채고 정리하는 집단적 능력이 더욱 요구된다. 그래도 이전에는 선진국의 상용 기술을 습득하는 단계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고자 추격하는 단계였다. 난이도가 높은 제품기술이나 설계기술까지도 도전한다. 기술추격 단계까지도 선진국의 기술경로를 따라가는 것이었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혹은 “휴일까지 반납하고” 연구개발에 매진하는 사례가 여전히 유효하였다. 그러니 수 십년 이상 엄청나게 ‘노력’하는 조직 문화가 성공을 이끄는 조직 문화였던 셈이다. 정부나 기업이 기술개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다는 사례가 조금 재밌으면서 황당하다. 예를 들어 삼성은 64K D램을 개발할 때 해외연수 직원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무박 2일의 ‘64km 행군’을 시켰고, 정부연구기관이 전자교환기 기술인 TDX 개발을 추진할 때 연구원들은 나중에 ‘TDX 혈서’라 불리는 서약서를 쓰기도 했다. 4장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LG, 현대, 삼성과 같은 민간 재벌이 (과잉투자를 우려하는 정부를 설득하면서) 수출을 전제로 한 석유화학산업에 진출(충남 서산의 대산석유화학단지)하고, 공기업인 포스코도 정부 지원이 감소하면서 기업 자율성을 강화해나가는 과정도 소개한다. 반도체 산업의 경우엔 삼성을 비롯한 민간기업이 주도해 나갔지만, 정부 역시 공장 부지, 용수, 도로 등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나 국가공동연구개발사업에 적극 개입했다. 이동통신기술(CDMA)의 경우는 여전히 공공부문이 기술경로를 선택하고 추진한 사례다. 저자는 굳이 구분하자면 1970년대까지는 ‘정부주도와 민간추종’, 1980년대 이후에는 ‘민간주도와 정부지원’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외환 위기 이후엔 어떨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라는 조직 문화가 여전히 유효했는지, 정부와 민간의 역할이 어떻게 조정되었는지 궁금하다. 기술습득이나 기술추격을 위해 해외연수를 보냈던 방식도 바뀌었을까? 외환 위기를 틈타 한국 기업의 기술을 획득하려는 중국 기업에 대한 설명도 나올 듯하다. (2025.3.17.)
5장(한국 경제의 전환과 기술선도)과 6장(맺음말)까지 읽기를 마쳤다. 5장에선 IMF 위기를 거치면서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산업에서 기술추격을 넘어 기술선도 국면에 이르는 사례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 국면의 기술혁신 유형을 기존 기술패러다임 내에서 진전되고 있는 기술경로를 선점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등) 경로선점형 혁신과 기술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기에 특정한 기술경로를 실현하는 (철강, 조선, 이동통신 등) 경로선점형 혁신으로 구분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원천기술을 자체적으로 확보한 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경로를 만들어가는 경로구성형 혁신을 들 수 있는데 저자는 국내에서 이런 사례를 찾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한국에서 성공 사례로 간주되는 산업 대부분이 규모집약산업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의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질적 성장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이와 함께 중국의 추격을 우려하는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2007년까지의 산업화와 기술발전을 다루고 있다. 이명박정부가 들고 온 ‘녹색성장’,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는 어떻게 평가해볼 수 있을까? 저자는 모든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른 점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이어진다고 지적하는데, 2008년 이후에도 이어지는 특징이 있는 것일까. 있기는 한 것일까. 윤석열정부의 경제정책은 별다르게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경제정책으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이 별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도 싶다. 정부가 특별한 경제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전 정부와 차별화되는 경제정책이었을까. (202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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