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대학 시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 도서관은 애써 피하면서도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에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가운데 매대에 진열된 새로 나온 책 코너에 보고 싶은 책이 없으면, 벽에 가득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을 둘러보다가, 한 권 뽑아 책장 앞에 서서 또는 넓은 책상에 앉아 들춰보곤 했다.
책을 살 때도 있었지만, 돈이 없을 땐 그 자리에서 수첩에 메모하며 한 권을 다 읽는 적도 많았다. 군 근무와 박사과정 때에도 작은 수첩이나 공책을 들고 다니며 기록하는 것이 지루함을 달래는 방법이었던 듯하다. 그 수첩과 공책들을 버리지는 않았으니 집 어딘가 잘 숨어있을 테다.
그 때 들인 습관 탓인지 박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원에 와서도 매년 나누어주는 연구원 수첩에 여러 아이디어들을 가득 메모하곤 했다. 수첩 표지 안쪽의 수납 공간에 빈 종이에 작성한 메모들을 꽂았더니 터질듯 두둑해졌다.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이용해 회의 내용 등을 바로바로 기록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몇 번 따라해보기도 했지만, 디지털 기기가 손에 붙지는 않았다. 블로그는 별거 아니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이라 그때 그때 느닷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용도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휴대폰의 메모장 앱도 가끔 사용하긴 하는데, 메모장에 입력하는 동안 생각은 고정되거나 휘발해버리곤 한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에 저장한 메모장은 화면을 켜고 파일을 찾아서 클릭한 후에야 눈 앞에 펼쳐지기에 느닷없이 내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다.
그때 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동안 포스트잇을 사용하기도 했다. 컴퓨터 모니터 상하좌우 빈 곳과 책상 옆 책장이나 벽에 포스트잇이 가득 붙었다. 흩어진 포스트잇을 한 군데 모아 정리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거나 새 해를 맞이하곤 했다.
어느날, 지저분하게 여기저기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보면서 심란해하던 때, 사무실 한 켠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화이트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 옆 창문 가에 들여놓고 아이디어를 적기 시작했다. 화이트보드가 메모로 꽉 차면 사진을 찍은 후 지우고 다시 시작.
대체로 연초에는 아이디어가 꽤 떠오르지만 날이 더워지면 화이트보드의 메모들은 말라갈 뿐이다. 과제를 마무리할 때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면 안 되지. 더 쓸 곳도 없잖아. 이제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켜고 글을 쓰라고. 메모로 가득 찬 화이트보드가 재촉한다. 그만 재촉하시오. 화이트보드를 쓸모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몇이나 있다고.
어제 동료가 내 자리에 와서 얘기하다가 햇볕이 너무 강해서 눈이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다. 남서향의 창가라 오후가 되면 햇볕이 깊숙하게 들어온다.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동료가 볼 땐 그래도 너무 밝은가 보다. 그나마 창가에 놓은 화이트보드가 햇볕을 상당히 가려준다. 아, 이런 쓸모도 있었군. 미처 몰랐다. (202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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