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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 쓸모 없음의 쓸모

어슐러 르 귄의 장바구니

지난 번에 읽은 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 마지막 문단을 끝내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 핑계로, 어슐러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구입했다. 르 귄의 소설을 여러 권 옮긴 이수현 선생이 번역했다. 르 귄이 1976년부터 1988년까지  쓴 강연, 에세이, 가끔 쓴 조각글, 서평들을 모은 책이라 한다. 때문에 책의 마지막 문단을 옮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싶다. 
 
<세계 끝의 버섯>의 마지막 문단은 '소설판 장바구니론'이라는 제목의 글에 나온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다. 르 귄은 비장하게 뼈를 갈아 만든 창과 화살을 들고 나가 야생 매머드를 쓰러뜨리고 돌아오는 피가 철철 흐르는 영웅의 이야기와 야생 귀리 낱알을 까고 또 까고 또 까느라 고생하다가 모기 물린 자리를 긁다가 도롱뇽을 구경하고 감자를 캐 바구니에 넣어 돌아오는 심심한 이야기를 비교한다. 여기서 르 귄이 강조하는 이야기는 피흘리는 영웅이 아니라 감자와 이것저것을 가득 담을 수 있는 바구니다. 바구니라니. 르 귄은 버지니아 울프가 '영웅주의'라는 단어를 '보툴리즘'으로 바꾸어 쓰려했던 시도를 소개하면서, 보틀(bottle)을 포함해 무언가를 담는 바구니가 역사적으로 더 중요했을 것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왜 바구니에 대한 이야기는 없냐고 되묻는다. 영웅 인간의 진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권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 끝의 버섯>의 마지막 문단이 나온 것이었다. 자, 자본주의의 흥망성쇠에 대한 큰 이야기도 좋지만, 누군가는 버섯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 않겠어. 
 
"만약 유용하거나, 먹을 수 있거나, 아름답다는 이유로 원하는 어떤 물건을 가방이나 바구니나 우묵한 나무껍질이나 잎사귀나 머리카락으로 짠 그물이나 뭐든 가진 수단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가는 게 인간이라면...... 집이라는 것도 사람들을 담는 큰 주머니나 가방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집으로 가져가서 나중에 꺼내 놓고 먹거나 나누거나 겨울 대비로 더 단단한 용기에 담거나 약 보따리나 사당이나 박물관에, 아니면 성스러운 물건을 보관하는 성스로운 곳에 담는다면, 그리고 다음 날에도 거의 같은 일을 또 하는, 그런게 인간이라면 나도 인간이다. 처음으로 온전히, 기꺼이, 기쁘게 인간이 되겠다." 
 
블로그에서 소소한 일상생활에 대해 쓰고 싶어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예감한다. 이미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방문자를 유혹하는 블로그도 가득이다. 나도 건조하게 제목을 달다가, 아들의 권유로, 약간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제목으로 바꾸기도 했다. 플로리다의 올랜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레이니어산, 세인트 헬렌산,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후드산, 컬럼비아강, 캐논비치, 스미스록 등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또는 검색어에 걸릴만한 장소에 대한 글은 부가적인 정보를 찾느라 괜히 길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적어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이 블로그에는 어떤 글을 이어서 쓸 것인가. 어쨌든 피 철철 흘리는 영웅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에 포틀랜드 알버타 거리에 있는 SF 서점에서 르 귄의 얼굴이 그려진 장바구니를 샀다. 왜 많고 많은 굿즈 중에 장바구니인지 궁금했는데, 이 '소설판 장바구니론'을 열심히 읽은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가족도 한국에서 가져간 물건 중 가장 유용하게 사용했던 것이 장바구니였다. 지금도 아내는 르 귄의 얼굴이 그려진 장바구니를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돌아다닌다. (202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