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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 일년살이

나무와 숲에 둘러싸여 보낸 포틀랜드 일년살이

포틀랜드 답지 않게 눈과 얼음으로 덮힌 도로를 뚫고 레이크 오스위고에 처음 들어섰을 때 보았던 더글라스 퍼(Douglas fir)가 기억난다. 오리건 주의 상징이기도 한 더글라스 퍼는 한 그루도 아닌 여러 그루가 레이크 오스위고의 관문처럼 높고 곧게 솟아 있었다.

더글라스 퍼는 북미 서북부 지역, 특히 오리건주에 많이 자라서, 오리건 소나무(Oregon Pine)라 부르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이 나무로 집을 짓고 배를 만들고 약재를 얻었기에 신이 내려준 선물로 여기며 소중하게 다루었다. 1930년대 이후 더글라스 퍼를 대규모로 벌목해 파는 목재산업은 대공황을 극복하는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포틀랜드를 스텀프 타운, 즉 그루터기 마을이라고 부른 것은 더글라스 퍼 숲을 잘라낸 너른 공터에 남은 그루터기들이 그만큼 인상 깊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도시 한 가운데에 남아 있는 더글라스 퍼는 신령스러운 느낌보다는 처량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겨울이라 특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눈과 얼음이 붙어 있는 가지는 아래로 축 처져 있어 어찌보면 괴기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실제 주택가에 있던 더글라스 퍼가 눈과 강풍에 쓰러져 주택 지붕을 덮쳤다는 뉴스도 보았다. 쓰러진 더글라스 퍼를 보면 땅 속 깊이 뿌리는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표를 따라 넓게 뿌리를 펼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늘로 솟은 줄기만큼이나 땅 속으로 뿌리가 깊게 박혀 있을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 더글라스 퍼의 뿌리는 땅 표면을 사랑한다.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표토가 쓸려 나가 뿌리를 누르는 힘이 약해지면, 조금의 무게만 더해져도 나무가 쓰러질 수 있다.

더글라스 퍼의 어찌보면 처량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도시 어디에서나 더글라스 퍼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이상했다. 어떻게 이런 나무가 주거, 상업, 공업 용지로 모두 바뀌어 버린 도시 한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일까. 쓰러져도 서로 지탱해줄 수 있는 숲이 아니기에, 표토가 쌓이지 않는 도시에서 더글라스 퍼는 기후변화에 위험하고 취약하다. 시가 소유한 공원에 남아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높이 솟은 더글라스 퍼의 어두운 그늘 아래 1, 2층 낮은 주택들이 스머프 마을인양 위치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어떤 더글라스 퍼는 마당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언제 쓰러질 지 몰라 무섭지는 않을까. 그만큼 더글라스 퍼를 사랑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를 태워준 우버 기사는 지난번에 내린 눈 때문에 쓰러진 길쭉길쭉한 더글라스 퍼를 대하는 시 정부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뭘까? 왜일까? 그럼에도 나는 이 상황이 왜 부러운 걸까? 찾아보니 레이크 오스위고 시는 ‘나무 조례(Tree Code)’를 통해 나무를 함부로 자르거나 훼손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무가 제공하는 공공의 편익이 매우 크기 때문에, 사유지에 자라는 나무들이라고 할지라도 일정 크기 이상인 경우에는 공적인 관리 대상에 해당한다. 내 땅에 자라는 나무라 할지라도 허가 없이 내 맘대로 베어낼 수 없는 것이다. 레이크 오스위고 시는 모든 나무들에 대한 목록을 가지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오리건의 상징인 더글라스 퍼 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가 그 대상이다.

신호등을 가리거나 전기줄을 방해한다고 시 정부가 나서서 가로수 가지와 잎을 댕강댕강 잘라버리는 한국의 도시들과 너무나 다르다. 레이크 오스위고를 비롯해 오리건 주의 도시들은 비슷한 나무 조례를 제정하고 도시 나무와 숲의 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하늘에서 보면 레이크 오스위고 토지(보도?)의 50%가 나뭇잎으로 덮혀 있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베어내는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를 심으면서 나뭇잎으로 덮힌 면적을 늘려가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도시의 열기를 식히는데 나무 그늘만한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공감도 얻고 있다. 이왕이면 레이크 오스위고에서 살아왔던 나무와 풀로 앞마당과 뒷마당을 꾸미자는 운동도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나무 그늘 면적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은 동네에서 나무 그늘 면적을 늘리기 위한 정책도 우선적으로 개발된다. 단순히 녹지 면적이 아니라 나무 ‘그늘’ 정책이라는 점이 중요한 듯 하다. 한국도 그늘 없이 잔디밭의 녹색으로 퉁치는 무늬만 녹색인 공원/녹지 정책을 탈피해야 한다.

여기에 살며 돌아다녀 보니, 보도와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나무 그늘이 풍족한 동네가 부자 동네더라. 이미 공공이 소유한 공원 등의 토지에는 나무 그늘이 가득하다. 하지만 사유지에서까지 나무 그늘을 빠르게 늘려 나가려면 예산이 부족한 시 정부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포틀랜드 시와 레이크 오스위고 시는 토지주와 주민단체를 설득하여 ‘토종’ 나무 그늘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렇게 보인다. 도로와 보도 위 머리 높이까지 뻗어온 나무가지가 잘려나가지 않고 일년을 버티는 상황마저도 그러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 결과를 우리 집 발코니를 오가는 작은 새들이 짹짹거리며 얘기해주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창과 발코니 앞의 계절따라 색을 바꿔 입던 나뭇잎과 아파트 앞 거리에 내리던 나무 그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